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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Work 2013~

Pandemic - Landscape distancing,복합재료,가변설치, 2021

 

 

 

 

 

 

 

 

 

Pandemic - Landscape distancing,복합재료,가변설치,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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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서문

<서교예술실험센터 결과공유회 링크展> 

<축적된자리 > 류민지,정서인展

 

 

축적된 자리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 무언가가 쌓인다. 물감의 층, 반복되는 장면들, 종이의 레이어가 교차하는 공 간 위에는 바라봤던 경험과 숱한 생각이 포개어져 있다. 쌓인 흔적을 바라보는 일은 타인의 지나간 시간을 상상하게 하고 때로는 자신의 시간을 대입해보게 한다. '축적된 자리'는 두 사람의 작업 과 정에 관한 은유이자 결과적으로 나타난 표면들을 가리킨다. 두 작가의 오랜 고민은 재현에 관한 고 착화된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자신만의 과정을 정밀하게 만들어나가는 데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업들은 잔여물이 걸러진 핵심만을 담고 있으며, 시간의 흐름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서로 맞닿는 다.

 

류민지의 ‘그리기’는 보았던 것에 대한 생각을 옮기는 과정이다. 언젠가 눈으로 보았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장면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다시 손으로 옮긴다. 이는 그리는 과정에서 반드시 직면하 게 되는 문제인 보기(감각하기)와 그리기의 시차를 더욱 벌려 놓아 시간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드러 내는 방식이다. 이에 더해, 작가는 때때로 같은 장면을 반복하여 그린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같은 장면’을 그려내기란 불가능하며, 반복은 지속되는 변화를 포착하게 한다. 그리기의 대상이 된 장면 이 그 자체로 시시각각 변할 뿐 아니라 그에 대한 기억, 주목하여 본 형태와 색의 흐름, 그리는 손 의 움직임도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계속해서 움직이는 장면의 기억을 반복하여 담아냄으 로써 변화하는 세계와 의식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렇게 장면들이 축적된 자리에는 수평이 남는다. 시간과 날씨와 공기의 흐름에 따라 그림의 모든 색채가 달라질 때에도 수평의 경계는 그곳에 남아 있다. 수평은 면과 면의 단순한 구분이자 이것이 멀리서 바라본 어떠한 장면임을,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는 풍경임을 상기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셈이다. 그렇다면 두 개의 면이 맞닿은 모습만으로도 누군가의 기억 속 풍경에 가 닿을 수 있을까? 류민지는 이러한 질문을 실험하려 더 단순한 회화를 만들어 간다. 이는 캔버스 내부에서 씨름하는 추상이라기보다는 외부 세계의 머릿속 단상이며 기억의 최소단위를 옮기는 작업에 가깝 다.

 

한편, 정서인이 만들어내는 일관되고 정제된 조형언어의 시작에는 한지와 불의 만남이 있다. 불을 태워 조형을 만드는 일은 찰나에 가까운 순간의 조절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작가는 불의 시간을 절묘한 때 멈추게 하여, 사라지기 직전에 만들어진 불규칙한 형상의 종이들을 얻는다. 종잇조각들 은 서로 이어지고 겹쳐지면서 흐르는 선으로 산과 바다를 이루는데, 보는 이가 그의 작업에서 하나 의 ‘붓질’이 그을린 종이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아차리려면 대개 가까운 거리에서의 일정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처럼 종이를 태우고 쌓아 겹을 만드는 과정에서 앞, 뒤, 옆면이 모두 가시화되기에 정서인의 작 업은 자연스레 평면과 입체를 가로지르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종이의 겹에 투명한 아크릴 을 더해 다각도로 교차하는 겹침을, 움직이는 복수의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신체의 지속적인 움직 임으로 발생하는 거리와 각도의 차이가 작업을 보는 데 주요한 요소가 되면서 공간은 변화하는 흐 름들의 총체가 된다.

 

자연은 언제나 그대로 있었던 것 같지만 계속해서 (바라보는 방식이) 쇄신되는 대상이라 할 수 있 다. 아크릴 칸막이로 구획된 정서인의 산수는 팬데믹 이후 익숙해진 ‘거리두기’의 풍경을 연상케 하 고, 사람 사이의 만남보다 자연과의 개별적인 마주침이 권장되는 오늘의 시간을 생각나게 한다. 바 이러스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시간이 쌓여 오늘의 풍경을 만들었고, 그 시간 또한 서서히 지나가려 하는 중이다. 그동안 잃어버린 것들과 새로워진 것들, 그럼에도 여전한 것들을 떠올려보 면, 깊어지는 고민 가운데에서도 계속하는 것 외에는 마땅한 해결책이 없었던 날들이 쌓여 이곳에 도달해 있다. 두 사람이 만들어낸 장면들의 시공간이 그러하듯, 새삼스럽게도 어제와 오늘의 시간 속에서 무언가가 축적되고 있음을 본다. 김명진